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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백일홍(배롱나무) 꽃의 추억이야기...멍주 2016. 8. 4. 18:59
연일 폭염주의보가 내려지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려주었고,
오늘은 소나기 대신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덥다는 생각은 못하고 지냈던 것 같다.
집 근처 마트를 갔다 오던 길.
아파트 화단에 피어있는 백일홍 꽃이 유난히도 붉어보였다.
배롱나무라고도 하는 그 나무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붉은 꽃이...
어느새 저렇게도 많이 피어 있을까.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 되면 언니와 동생들은 어딘가로 나가 버리고
혼자 남아 안방 책장에 꽂혀있던 고전 문학 전집을 아버지 몰래 꺼내와서는
바람이 서늘한 대문 옆 사랑채 마루에 누워
이해하지도 못한 채 마구잡이로 읽고 있다가 엄마의 부름에 심부름을 가야 했다.
무성하게 돋아나는 잡초를 뽑느라 바쁘신 할머니의 점심을 들고 밭으로 가는 심부름을...
지금 그 길을 올라가 보면 그다지 멀지도 않은 길인데
점심 식사가 담겨있는 바구니를 들고 가던 그때 그 길은 왜 그렇게 멀기만 한지...
온종일 밭에 엎드려 계시던 할머니는 손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굳은 허리를 곧추세우시며 기다렸다는 듯이 콩밭 한가운데서
목을 길게 빼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셨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매미 소리를 들으며
할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다가도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재잘거리는 소리를
싫은 내색 없이 늘 웃으시며 들어주시던 할머니.
밭 일이 일찍 끝날 것 같은 날엔 흙장난을 하며 기다렸다가
할머니와 같이 내려오던 길 가장자리로
붉은 꽃이 만개한 나무를 보며 이름을 물었더니
‘처녀귀신나무’라고 하시며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
「밥을 많이 안 먹어서 비쩍 마른 아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는데
그다음 해부터 여자 아이의 무덤가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더니
해마다 붉은 핏빗의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파르르 떨고 있는데 그게 바로 백일홍 나무였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점심 바구니를 들고 올라가는 그 길이 무서워
심부름을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내 어린 시절.
그때는 백일홍 나무를 그렇게 무서워했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그 이야기는 밥을 많이 먹으라고
해주신 이야기인 것 같다.
가끔씩 백일홍 나무가 보이면
떨고 있다는 처녀귀신 이야기가 생각나서 웃게 되지만
여름 방학이면 늘 할머니와 함께 하던 그 시절이 기억 속에 남아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도 가끔씩 찾아가는 그 언덕길.
백일홍 꽃이 붉게 피어있는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사랑하는 내 할머니와 아버지가
햇살이 환~한 언덕 위에 잠들어 계신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의 그 길 위에는
할머니의 거친 손을 꼭 잡고 내려오는
여자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내 어린 시절 여름날의 추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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