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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 김영란
천만개의 별빛
2018. 6. 2. 14:57
가스레인지 위에 찌개를 올려놓고
습관처럼 편지를 썼다
나는 부엌에서 팔팔 끓는 소리 듣기를 좋아한다
구름처럼 치솟은 하얀 수증기 사이로
어둑한 저녁 시간이 부엌 바닥에 고였다
사생활이 푹푹 끓을수록 내면은 물러졌다
가라앉았던 내 단어들도 열기에 익어갔다
넘칠 듯 넘치지 않는 생각들,
끓는 소리가 고요한 부엌을 적셨다
어느새 뜨거운 습기가 내 발바닥부터 적시고
흘러내린 바지자락에 달라붙었다
아직 우러나올 시간이 부족한 찌개는
밑불 약하게 졸여야 하므로
앞치마에 손 문지르며 부치지 못했던 편지 몇 통을 더 태우기로 했다
부엌에서
나는 한번 젖어버린 발처럼 참말 편했다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걷다가 신발에 빗물이 새
젖지 않은 발이 비집고 올라오는 빗물을 처음 만날 때
조금 망설이고 조금 두려워했을 뿐,
물 스미는 고무장갑 벗어버리고 맨손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다시 주전자 가득 물 끓이며 그 물이 다 증발할 때까지
먼 물소리 들으며 편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