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날
새벽밥을 짓기 위해 일어난 이른 아침.
주방 창 너머로 보이던 하~얀 세상에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하루 종일 행복했던 어제.
경우에 따라서는 지겹고 짜증 나는 ‘눈’일 수도 있겠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에겐 그 눈이 가져다준 행복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제대로 준비도 못한 채로 점퍼를 껴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생필품을 사러 나가는 그 마음을 알 수가 있을까.
그늘진 아파트 뒤편 언덕에서 장바구니를 던져놓고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사람도 하나 만들어서
눈과 코와 입을 새겨 넣으며즐거워하는 모습은
아직도 마음속엔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남아있나보다.
낮동안 내리쬔 햇살에 내 눈사람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하루는 그렇게 행복했던 날로 기억에 남아있을 듯.
저녁을 먹고 한가로이 커피 한 잔을 즐기고 있던 중 걸려온 엄마의 전화.
안부 인사차 시골에도 눈이 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답 대신 잠잠해지는 엄마 목소리.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찾아드는 불안감.
왜 그러냐고 재차 물었더니 그제야 들려오는 엄마의 말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눈이 내려 쌓여있어서
습관처럼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아래채로 내려가니
“연안댁이 좋아하는 눈이 많이 왔네. 눈 오는 게 그렇게 좋아?”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랐다며
그 길로 보온병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타서
산소에 가서 봉분 위에 내려앉은 눈을 쓸어내려놓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내려왔다는 말을 하셨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1년의 세월 동안 조금은 편안해지던 마음이었는데
이런 작은 일에도 그렇게 아버지는 불쑥불쑥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돌아가시면 그런 것도 못 보니까 엄마도 늘 조심하고
오래오래 살아서 엄마가 좋아하는 눈도 실컷 보라는 말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엄마는, 아버지와 나누었던 많은 추억들과 함께
시골집에서 지금껏 살고 계셨나 보다.
그리고 나만 눈을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엄마도 눈을 좋아하셨구나.
지금껏 살면서 왜 그런 생각은 전혀 못해봤을까?
참 못나고 모자란 딸이었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좋은 쪽보다는 안 좋은 기억이 더 많았는데
그래도 엄마가 느낀 아버지는 나와는 다른 감정으로 간직하고 계셨나 보다.
그래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좋은 느낌이겠지.
눈이 내린 날, 이렇게 또 다른 기억 하나를 가슴에 새기며
이 겨울은 조용하게 지나가겠지.
이젠 아무 말씀도 없으신 울 아버지처럼...